2016년 3월 2일 수요일

후암동

그렇구나.

'두텁바위'가 '후.암.'의 우리말 이었구나.
지금은 없어졌다는데, 여기서 사람들이 자식이 생기길 빌었구나.
새로움과 생명을 원하던 곳.

후암동.
끌리는건 몇 없는 기억때문인가 했었는데,
새로운 걸 시작하기에 좋은 기운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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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후암동 84, 85번지 부근에 있던 고개로서, 예전 이 고개에 두텁바위(厚岩)가 있었으므로 두텁바위고개라 하였다.    이로 인해 오늘날 후암동(厚岩洞)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후암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남부 전생서내외계(典牲署內外契) 전생서동(典牲署洞) 또는 전생동(典牲洞)이었다가 일제 때인 1914년 4월 1일 경성부 서부 삼판통(三坂通)으로 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동명을 우리 말로 고칠 때 두텁바위의 명칭을 취하여 후암동(厚岩洞)으로 고쳐 지금에 이른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두텁바위는 모양이 둥글고 두텁다 하여 그렇게 불리어졌는데, 예전 인근에서 자손이 귀한 사람들이 이 바위에 찾아와서 자손 얻기를 빌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두텁바위가 있던 마을이름을 정성세라 하였다. 그것은 지금 후암동 370번지에 조선초기부터 전생서(典牲署)라는 관청이 있어서 그 부근을 전생서마을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정성세로 되었다 한다.    전생서는 희생(犧牲), 즉 국가 제사용 소와 돼지·양 등을 맡아 기르던 관청으로서 판관(判官)·주부(主簿)·직장(直長)·봉사(奉事)·참봉(參奉) 등의 관원이 있어 일을 맡아 하였으며, 후에는 사축서(司畜署)를 병합하기도 했다.    전생서의 정청(正廳)에는 「간촬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촬자의 뜻은 풀싹이 잘 자라고 소와 양이 살찌고 커짐을 말함이다.   전생서의 방목장(放牧場)으로 전해지는 넓고 평평한 언덕을 「양념재비뜰이」로 불렀다. 그것은 가축들이 양념같이 잘 먹는 좋은 풀이 자라는 들판이라는 뜻이라 한다.
정청 옆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가에 있는 정자 이름을 불구정(不垢亭)이라 하였다. 또 옛날 전생서 방목장으로 전해지던 넓고 평평한 언덕진 곳을「양념재비뜰이」로 불렀다. 짐승들이 양념같이 잘 먹는 좋은 풀이 자라는 버덩(들판)을 의미한다.
# 참조: 서울시 홈페이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 http://www.seoul.go.kr/life/life/culture/history_book/seoul_ridge/yongsan/1202928_2959.html
# 참조2: 지역정보포탈, http://www.oneclick.or.kr/index.jsp

카페후암동 (02.752.8232)
-서울 용산구 후암로33
-카페라떼 4,500원

밝고 따뜻하고... 카페이름에 끌려 들어갔는데 인테리어와 소품 모두에 신경 쓴, 기대 안했던 만큼 더욱 멋지게 느껴졌던 분위기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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